명동촌 초입에서 '명동, 윤동주생가'라는 글을 새긴 커다란 바위가 우리를 반겼다. 이 일대가 명동촌(明東村). 넓게는 명동지구라고 하는 곳이다.
조선 회령의 덕망 있는 한학자 규암(圭巖) 김약연( 金躍淵, 1868~1942)이 1899년 2월 문병규, 김하규, 남도천, 문치정 등과 함께 142명을 이끌고 이곳 명동 일대로 이주하였다. 김약연은 일찍이 8세 때인 1875년부터 10여년 간 함북 종성 출신의 유학자들인 남종구, 오삼열, 주봉의 등의 문하에서 한학을 하였다. 김약연은 '맹자(孟子)'에 통달하였다.
이렇게 한학에 몰두하던 그는 국운이 기우는 것을 보고 무인지경에 있는 간도 화룡현 장재촌에 이주하여 한인촌 명동촌을 일구었다. 이들은 명동지구 토지를 사들이고 사들인 토지에서 제일 좋은 땅을 떼내어 학전(學田)으로 하고 서숙을 꾸렸다.
▲ 회령 출신 김약연이 동포와 함께 이주하여 조성한 명동촌. 이곳에 윤동주 시인의 생가가 있었다.
정원이 55명인 버스가 마을 안으로 깊숙이l 들어 갔다가 오도 가도 못하게 됐다. 길이 좁아 차를 돌릴 수 없는데, 전깃줄이 낮아 버스에 걸린다. 몇 사람이 버스에서 내려 장대로 전깃줄을 높이 들어 올리는 사이 버스가 전진과 후진을 거듭했다. 대성중학교를 출발할 무렵 하늘이 검어지더니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간도일본군총영사관, 윤동주 묘는 다음 기회에 보기로 하고 명동촌으로 곧바로 왔는데 길이 문제다. 겨우 돌아나오는 데 성공하여 우리는 운전기사에게 뜨거운 박수를 보내고 환호성을 질렀다.
▲ 명동촌에 복원한 명동교회와 윤동주 생가 정문에는 '중국 조선족 애국시인 윤동주 생가'라는 안내글이 크게 들어온다.
명동촌에는 명동교회, 윤동주 시인의 생가를 정비하여 복원하였다. 정문에는 오른편에 '중국 조선족 애국시인 윤동주 생가'라고 새겨놓았고, 왼편에는 윤동주 시인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새겼다. 그 안으로 십자가가 보인다. 유학자가 세운 교회. 1901년 김약연이 장재촌에 '규암재'라는 서당을 세우고 김하규와 남위언은 장재촌과 영암동에 서당을 열었다. 1907년 이상설이 세운 용정의 서전서숙이 폐교된 후 김약연은 규암재를 중심으로 김하규, 남위언 등의 서숙을 통합하여 1908년 4월 27일 명동서숙을 세우고 초대 숙장이 되었다. 명동이란 해동성국인 조선의 광명을 안아온다는 뜻이 담겼다. 이때부터 마을도 명동촌이라 부르게 되었다. 명동서숙은 1909년 4월 사립명동학교로 발전하였고 우수한 교원을 초빙하였다. 이때 정재면이 초빙되어 왔는데 그는 신민회(新民會) 회원으로 서울기독교청년학교를 졸업했다.
▲ 명동촌을 일구고 명동학교를 세워 독립운동을 한 김약연의 비석이 외롭게 서 있다.
정재면은 명동에서 기독교를 받아들여 신학을 가르칠 것을 제의하였다. 유교사상을 버리고 기독교를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두고 논의를 거듭하던 끝에 유교를 버리고 기독교를 신앙하기로 하였다. 이는 신학을 접수하고 반일민족교육울 위하여 김약연이 결정한 것이었다. 이는 사상면에서의 일대 변혁이었다. 김약연은 유교를 버리고 왜 기독교를 받아들였는가."기독교는 그 교의에 민주, 과학 사상이 있는 것은 아니었으나, 전도사 목사를 통하여 서양의 민주와 과학 사상이 전래되었고, 또 북간도의 특수사정으로 보아 중국과 일제의 압제를 더 적게 받으려면 기독교에 귀의하는 것이 옳을 것이라 설득되어 기독교를 믿게 되었던 것이다."(박청산, '내 고향 연변', 연변인민출판사, 2004, 58~59쪽).
명동학교는 교원이 조선에서 온 애국지사들과 진보적인 인사들이었다. 그래서 날로 명성이 높아져 연변과 동북지구는 물론 조선과 러시아 연해주의 학생들까지도 몰려들었다.
▲ 복원된 명동교회는 명동역사전시관으로 활용하는데 명동촌이나 김약연 관련 자료보다는 윤동주 시인 관련 자료가 더 많았다.
김약연은 명동촌에 연변(延邊)교민회를 조직하여 회장으로서 활동하였으며, 1909년에는 간도 간민회(墾民會)를 이동춘 등과 함께 조직하여 역시 회장으로 활약하였다. 김약연은 1910년 3월 명동학교에 중학부를 설치하고 교장이 되어 청년들의 애국정신을 함양하였다. 이때 명동교회도 세웠다.
지금 복원된 명동교회는 명동역사전시관으로 활용된다. 안으로 들어가니 각종 자료와 함께 명동촌, 김약연, 윤동주 시인 사진 등이 전시되어 있다. 얼핏 헤아려도 명동촌, 김약연 자료보다는 윤동주 시인 자료가 더 많다. 해설하는 이도 윤동주 시인에 관해 더욱 상세하게 전해준다.
1912년에 이동휘(李東輝)가 명동으로 망명해오자 김약연은 연변교민회를 발전적으로 해체, 독립운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하기 위해 북간도국민회(北間島國民會)를 창설, 초대 회장에 취임하여 독립운동의 선봉에 나섰다. 1918년 김약연의 지도로 명동학교, 창동학교, 정동학교 학생들은 충열대, 단지동맹회, 광복단 등 결사대를 조직하여 무장투쟁에 매진하였다.
▲ 용정 명동촌 윤동주 시인 생가에는 윤동주 시인의 시를 곳곳에 새겨놓았다.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명동학교는 반일민족독립운동의 인재를 양성하는 데 박차를 가했다. 명동학교에서는 국경일, 국치일을 맞아 태극기를 걸어놓고 김약연 교장이 민족애를 피력하였다. 교사들은 시험문제나 작문에는 애국과 독립의 내용을 담지 않으면 점수를 주지 않을 정도로 민족의식과 애국심을 깨웠다.
1919년 3ㆍ13반일운동에는 명동학교의 충열대가 선두에 섰다. 이후 조직적 무장투쟁이 전개되자 명동학교는 간도국민회 남부지회의 주요한 근거지가 되었다. 그후 봉오동, 청산리 전투에 참가한 핵심 인력이 되었다.
이러한 명동학교에 대한 일제의 보복은 처참했다. 1920년 10월 20일 일제는 촌민들을 명동학교 마당에 모아놓고 명동학교와 명동교회, 간도국민회 남부지회 회장 마건의 집을 불질러 잿더미로 만들어놓았다. 90여명의 교직원과 촌민을 체포하고 10여명을 살해했다. 일제 군경이 물러가자 명동사람들이 학교를 재건하였다.
이 때 김약연은 독립운동에 몰두했다. 김약연의 독립운동을 국가보훈처가 1987년 펴낸 "대한민국 독립우공자 공훈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김약연은 1919년에는 독립운동을 위한 통일체로서 '대한독립기성총회(大韓獨立期成總會)'를 조직하여 의사(議事)부원으로 김병흡(金秉洽)・고용환(高龍煥)・강구우(姜九禹) 등과 함께 활약하였다. 동년 3월 13일에는 간도 용정(龍井)에서 개최한 대한독립선언대회를 정재부(鄭在負) 등과 주도하였으며 동년 3월 또한 노령(露領) '니코리스크'에서 개최된 대한독립선언과 파리강화회의에 대비한 전로한족중앙총회(全露韓族中央總會)에 북간도 대표로서 참석하여 일제에 강력한 항의문을 발표하였다.
▲ 윤동주 시인의 생가터를 알리는 비석.
1923년 2월 26일에는 24처 지방대표가 모인 가운데 전간도주민대회를 개최하여 간도에 거주하는 30만 한국인의 재산과 생명보호를 위한 자치권(自治權)을 확보하기 위해서 노력하였다. 이러한 활동내용들을 탐탁지 않게 여긴 일제는 그를 한국독립운동의 '수령자(首領者)'로 또는 100만 동포의 대표자로 부르기도 하였다. "
박청산의 '내 고향 연변'를 참고하면 1922년 가을 2년간의 옥고를 치른 김약연은 명동으로 돌아와 다시 교장직을 맡아 교육에 전념하였다. 그러나 1924년 대흉년이 들어 학교 운영이 어렵게 되자 이듬해 중학부를 취소하게 되었다. 이때 많은 교원이 학교를 떠났고, 학생들도 일부 용정의 여러 중학교로 진학하였다.
이 무렵 학교는 종교의 속박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여론이 일었다. 김약연은 어쩔 수 없이 학교를 떠나 용정으로 이사하여 예수교 장로회목사가 되었다. 이때 명동학교는 교회의 속박에서 벗어나 사립학교가 되었다.
▲ 복원된 윤동주 시인 생가.
김약연은 1927년 '북간도기독소년회'를 창립하고 구춘선, 강백규, 김영학 등과 '북간도국민회'의 재건운동에 착수하였다. 1938년 2월에는 룡정기독교 은진중학교와 명신녀학교의 이사장으로 취임하였다. 1942년 10월29일 용정의 자택에서 7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77년에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하였다.
명동학교는 개교이래 8년간 1천 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그 가운데 반일민족독립운동가가 적지 않았고 문학가, 예술가도 있다. 영화배우 라운규, 저항시인 윤동주가 이 명동학교 출신이다.
명동역사전시관을 나와 윤동주 생가로 발길을 옮겼다. 곳곳에 윤동주 시인의 시를 새겨놓았다.
글/사진. 정유철 기자 npns@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