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천 부평구 십정동. 재건축 조합과 반대 주민 사이에서 10년 넘게 끌어오던 고질적인 지역 갈등을 한 공공갈등조정관이 나서서 해결했다. 부평구청 김미경 조정관 얘기다.
사건의 발단은 11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인천 부평구 십정동에 위치한 목화연립은 지은 지 30년 된 낡은 연립주택. 건물이 너무 낡아 붕괴 위험을 안고 사는 주민들은 2000년에 이미 안전진단 D등급 판정을 받아 재건축을 추진했다.
문제는 주택단지 한가운데 버젓이 자리 잡고 있는 높이 60미터의 고압 송전탑. 재건축을 하려면 34만5천 볼트의 이 송전탑을 이설해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았다. 이설 예정지 주민들의 반대가 거셌기 때문이다.
인천 부평구에 대체 무슨 일이?
그때부터 목화연립 재건축 조합 측과 고압 송전탑 이설에 반대하는 지역 주민들 사이에 길고긴 갈등이 시작됐다. 2005년에는 지역 초등학교 학부모들이 송전탑 이설에 반대해 아이들을 등교 시키지 않는 사태까지 벌어졌고, 조합 측과 반대 지역 주민들 사이에소송이 줄을 이었다.
그러다 지난해 법원은 송전탑을 이설하되 지중화(송전선을 지하로 매설하는 작업)를 추진하라는 조정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지중화 작업도 만만치 않았다. 지중화를 진행하려면 4백억 원의 예산이 필요한데, 재정이 넉넉하지 않은 한국전력과 지자체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송전탑을 이설해야 재건축을 할 수 있는 조합 측과 이설에 반대하는 주민들 사이에 갈등의 골은 점점 깊어졌고, 해결의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김미경 씨가 갈등 조정에 나선 것은 올 2월, 조합 측이 공사를 강행하려는 움직임을 보였을 때다. 반대 주민 측은 공사를 저지하기 위해 송전탑에서 연일 천막 농성을 벌이고 있었다. 자칫하다간 유혈 충돌이 일어날 수도 있는 긴박한 상황. 보다 못한 홍미영 구청장이 김미경 씨를 호출했다. NGO 시절부터 빈민지역 활동을 같이 했던 홍 구청장은 김씨가 사회갈등연구소와 한국갈등관리조정연구소에서 활동하고 인천법원 조정위원으로 활약한 경험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사태를 파악하고 나니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재건축 조합 측, 반대 주민 측, 인천시와 한국전력, 부평구까지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데다 조합과 반대 주민 사이에 갈등이 깊어 대화의 여지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김 조정관은 갈등 조정까지는 어려울 것이라고 판단하고, 홍 구청장에게 갈등 영향 분석을 제안했다.
“갈등을 해소하려면 이해 당사자 사이에 최소한의 신뢰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중요해요. 그런데 갈등이 있는 곳에는 항상 사실관계가 왜곡된 부분이 많거든요. 본의 아니게 왜곡된 부분도 있고, 이해당사자들이 확대재생산하는 경우도 있죠. 갈등 영향 평가를 하면 갈등 당사자들을 인터뷰하는 과정에서 사실 관계를 명확하게 밝힐 수 있기 때문에 최소한 불필요한 오해는 풀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갈등 해소보다 신뢰 회복이 먼저
그런데 갈등 영향 평가를 시작하자마자 난관에 부딪혔다. 지역 주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조합 측이 2월 중순부터 공사를 감행하기로 한 것. 이대로는 조정이 어렵겠다는 생각에 김 조정관은 구청장 면담을 요청했다.
“조합 측이 공사를 진행하는 상황에서는 영향 평가든 조정이든 할 수가 없었어요. 조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신뢰인데, 서로 갈등 상황을 파악하자고 해놓고 한쪽에서 공사를 시작해버리면 반대 주민들이 회의에 참여할 이유가 없죠.”
김 조정관은 조합 측에 공사를 한 달만 미루자고 제안했다. 그 사이에 갈등 조정을 시도해볼 요량이었다. 하지만 조합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미 한국전력에 단전 일자를 잡아놓은 데다 공사를 한 달이나 미루면 몇 억 원의 손해를 고스란히 떠안아야 했다. 결국 구청장과 김 조정관이 조합 측과 한국전력을 달래고 설득해서 간신히 공사를 미루는 데 성공했다.
이제 한 달 안에 조합 측과 반대 주민 측의 합의를 이끌어내야 했다. 김 조정관은 초기에는 이해당사자들이 갈등 조정에 대한 인식 자체가 아예 없어 조정하는 데 애를 먹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오해도 많이 샀어요. 사실 관계를 파악해야 하니까 조합에 가서는 반대 주민 입장을 얘기하고 반대 주민들에게는 조합 입장을 얘기하다 보니, 도대체 어디서 보낸 거냐고 의심을 하더라고요. 부평구에서 채용한 갈등조정관이라고 설명하면 그럼 구의 입장을 대변하러 왔느냐고 또 물어요. 갈등조정관은 특정한 이익집단을 대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일일이 이해시키고 나서야 비로소 대화를 시작할 수 있었어요.”
그도 그럴 것이 우리나라에서 지역 갈등 문제에 이해당사자가 아닌 제3자가 나서 갈등을 해결한 사례는 이번이 처음이다. 부평구도 국내 최초로 갈등조정관을 채용하기 위해 관련 조례를 샅샅이 뒤져야 했을 정도다. 이러한 열악한 상황에서도 김 조정관은 조합 측과 반대 주민대표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설득에 설득을 거듭했다.
그동안 이 문제로 조합 측은 조합대로, 반대 주민은 또 그들대로 너무 많은 고통을 받아왔다. 김 조정관은 어떻게든 빨리 갈등을 해결하는 것이 주민들 모두에게 이롭다는 마음 하나로 일에 매달렸다. 그런 노력 덕분일까. 끝까지 송전탑 이설에 반대하던 주민대표들이 하나둘 합의문에 동의하기 시작했다.
“합의문 발표 기자회견 전날, 끼니도 거른 채 주민들과 밤 11시까지 마라톤 회의를 했어요. 그런데 마지막까지 주민대표 한 분이 나타나지 않고 연락도 안 되는 거예요. 부랴부랴 연락하고 설득해서 늦은 밤에 집까지 찾아가 간신히 사인을 받았어요. 홀가분한 마음으로 주민대표들과 막걸리 한 잔을 하는데, 주민들이 무척 고맙다고 말씀하셔서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나더군요.”
결국 지난 4월 7일, 조합 측과 반대 주민들 사이에 극적인 합의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아직 갈 길은 멀다. 송전탑 이설에는 합의했지만 아직 지중화 논의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지중화 논의를 위해 조합 측과 인근 지역 주민들뿐 아니라 인천시, 한국전력, 부평구가 모두 참여하는 민간협의회가 꾸려질 예정이다.

공공성으로 소통의 물꼬를
10년 묵은 갈등을 해결한 김 조정관 역시 이번 일을 계기로 공공 갈등조정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갈등조정관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건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관점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래야 이해당사자들이 대등한 입장에서 대화를 나눌 수 있기 때문이다.
“갈등 상황은 단순한 ‘사건’이 아니에요. 이해당사자들이 불편하게 여기면 언제든 상황이 바뀔 수 있는, 살아 있는 유기체로 봐야 해요. 조정하는 사람이 어떤 철학을 갖고 접근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완전히 달라질 수도 있어요.
그래서 갈등 조정에는 노련한 기술보다 조정하는 사람의 가치관 즉, 공공성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일방적으로 어느 한쪽에 유리한 관점을 가지는 게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가 앞으로 나아가는 데 가장 건강한 방법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는 사람들이 이 일에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김 조정관이 갈등 조정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NGO 활동을 하면서부터이다. 25년간 인천지역에서 NGO 활동을 꾸준히 해온 그는 갈등 상황에 처한 사람들이 도움을 받으려면 사회적 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는 사실에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파듯 갈등 조정 교육을 받게 됐다고 한다. 생활에서 느끼는 사소한 불편이나 문제의식을 허투루 넘기지 않고 방법을 찾고 개선 방향을 고민하다 보니 어느새 지금에 이르렀다는 말이다.
“가장 본질적인 것은 역시 철학이에요. 나만 잘되겠다고 생각하면 해결 방법이 안 나와요. 우리가 다 같이 잘 되는 길을 찾기 위해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다 보면 창조적인 아이디어가 떠오르더라고요.”
누구도 손대지 못했던 고질적인 지역 갈등을 한 달 만에 해결한 밑바탕에는 건강한 공공성을 지향하는 가치관, 바로 ‘홍익’의 철학이 있었다.
글·전채연 ccyy74@naver.com
사진·김성용 Pangod@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