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으로 다른 세계의 '이치' 배우기

게임으로 다른 세계의 '이치' 배우기

박근서 대구카톨릭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뇌2002년12월호
2010년 12월 23일 (목) 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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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곳은 알 수 없는 세계, 사람들은 이 곳을 ‘스피라’라 부른다. 아주 오래 전부터, 내려 오는 전설, 모든 세계들이 그렇듯이 ‘스피라’에도 오래된 전설이 있다.

아주 오랜 옛날, 스피라는 베벨과 자나르칸트라는 두 나라로 나뉘어 있었고, 이들은 불화와 갈등을 거듭한 끝에, 타방을 멸하지 않으면 결코 끝나지 않을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인다. 이 전쟁은 자나르칸트의 참혹한 패배로 끝났으니, 전쟁에 패한 자나르칸트인은 베벨의 지배를 거부하고, 스스로의 목숨을 끊어 그들의 영혼을 계곡에 봉인하였다. 베벨과 자나르칸트의 전쟁이 끝난 뒤, 2,000년이 흘렀고, 전설은 시작된다.


자나르칸트 에이브스(‘블리츠 볼’이라는 수중 격투 구기팀)의 스타플레이어 티다는 그 날도 어김없이 게임을 위해 돔으로 향하고 있었다. 전광판으로 비치는 아버지의 얼굴, 그의 아버지 젝트는 블리츠 볼 역사상 최고의 선수였으며, 실종된 지 1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팬들의 사랑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티다에게 젝트는 넉살 좋은 주정꾼으로 기억될 뿐이다.

이제 시작이다. 돔에 물이 가득 채워지고, 볼이 튀어 오른다. 그 순간 자나르칸트는 ‘신’이라는 거대한 괴물의 습격을 받는다. 무너져 내리는 돔에서 그를 구한 건, 15년 전 아버지와 함께 사라졌던, 아론이었다. 아론의 도움으로 간신히 살아난 티다는 ‘신’의 공격으로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에 떨어진다.


비사이드라는 해변 마을에서 티다는 와카, 루루, 유우나, 키마리를 만나게 된다. 이들은 소환사(기도자의 영혼을 영적 괴수로 소환하여 스피라의 마물들을 물리는 성직자) 유우나를 중심으로 신을 물리치기 위해 모험을 떠나는 원정대였다. 티다에게 유우나의 원정대는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이들 원정대에 곧 자나르칸트에서 마주쳤던 아론이 합류하고, 이어 유우나의 사촌인 류크가 합세한다. 이렇게 일곱명의 원정대(7인의 사무라이가 생각나는 대목이다)는 신을 무찌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궁극의 소환수를 얻기 위해 스피라의 이곳 저곳을 헤매게 된다. 그리고 그들은 모험의 끝에서 어마어마한 진실을 깨닫는다.


신은 단순한 괴물이 아니라, 2,000년전 베벨에 의해 무참히 짓밟힌 자나르칸트인들의 영혼들이 한데 모인 원망(怨望)과 저주의 덩어리 - 이를 ‘에본 쥬’라 부른다 - 였으며, 눈에 보이는 괴물이란 결국 에본 쥬의 껍데기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원망과 저주의 덩어리를 풀어 녹이지 않는 한, 신은 사라지지 않는다. 궁극의 소환수가 신을 무찌른다 해도, 에본 쥬는 곧 그 껍데기를 무찌른 새로운 껍데기로 옮겨가기 때문이다. 신을 무찌른 뒤의 평화란 에본 쥬가 새로운 껍데기에 남아 있는 인간 영혼의 찌꺼기를 몰아내고 그것을 완전히 자기의 것으로 포섭하는 데 필요한 잠깐의 시간일 뿐이다.

신은 자나르칸트인의 원망과 저주의 덩어리이며, 그 안에서 자나르칸트인들의 영혼은 다른 세상으로 차마 떠나지 못하고 그들의 삶을 살고 있었던 것이다. 티다는 이렇게 영혼들이 사는 삶, 즉 2,000년 전에 사라진 자나르칸트인의 영혼들이 꾸는 꿈이고, 단지 자나르칸트와 스피라를 잇는 유일한 매개인 신에 의해 이 곳에 이렇게 서있는 것뿐이다.

이제, 신을 물리치고, 그 안에 있는 에본 쥬마저 물리친다면, 자나르칸트인들의 영혼은 더 이상 신을 만들지도 않을뿐더러 더 이상 꿈을 꾸지도 않을 것이다. 길고 지루한 싸움 끝에 에본 쥬가 사라지고, 티다 또한 그를 꿈꾸던 영혼들과 함께 사라져 버린다.(스퀘어소프트, 파이널 판타지 X)


게임은 단순한 놀이가 아니다. 레고 블록이나 그림책, 동화책이 아니며 장기나 바둑도 아니다. 그것은 또 하나의 세계이다. 물론 이 세계는 허구다. 우리 세계를 그대로 옮겨 놓은 재현의 세계가 아니라, 오직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그럴듯한’ 세계이다. 그렇지만, 게임의 그럴듯함은 현실의 그럴듯함과는 전혀 다르다.

게임은 게임의 규칙, 게임 세계의 코드를 따른다. 그러므로 우리세계의 연장선상에서 게임을 대한다면 심각한 낭패를 경험할 수밖에 없다. 이해할 수 없는 부조리, 납득할 수 없는 허황된 꿈이 그 세계를 지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상을 통해 움직이는 한, 게임은 우리들이 그리워하는 세계이다. 게임은 역설적으로 우리세계의 부재함 혹은 우리 세계의 타자성을 드러냄으로써 그것을 드러낸다.


눈앞에 한 장의 사진이 있다. 그 사진 안에는 길이 하나 있다. 길옆으로 길게 늘어진 전선에 목을 묶인 전봇대가 늘어서 있다. 이 길의 끝이 어딘지 그 끝을 알 수 없다. 곧게 한없이 뻗은 길 위로, 한 사람이 걸어간다. 흔히 볼 수 있는 이미지일 것이다. 이런 사진을 놓고 우리가 묻는 것은 대개 “어디로 가는가”하는 질문 뿐이다. 사진은 세계의 일부일 뿐이다. 그 프레임은 우리 세계의 한 부분이 잘려 나와 인화지 위에 정주(定住)한 데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세계는 프레임 안이 아니라, 프레임 바깥에 있다. 우리가 세계를 인식하고 세계를 느끼는 일 또한 마찬가지다. 세계는 우리세계의 없음을 통해 우리세계가 아님을 통해 스스로를 드러낸다.

나는 게임을 통해 하나의 세계를 창조하고 또 그 세계를 지배할 수 있다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게임은 내게 끊임없이 저항하고 있다. 실제 세계에서 컴퓨터에 키보드를 두드리고 마우스 버튼을 클릭하는 단순한 몇 가지 동작을 몸에 익힘으로써 CRT너머의 세계를 완벽히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CRT 속 존재는 마우스에 연결된 끈으로 움직이는 마리오네트가 아니었다. 놀라운 것은, 그들 또한 내게 요구하고 나를 비난하며 심지어 싸움을 걸어오기조차 한다는 점이었다.

피터 몰리뉴의 <던전키퍼>에 출연하는 유닛들은, 나의 무능과 무관심에 실망하며 내가 펼쳐 놓은 세계로부터 이탈하기도 하고, 치열한 전투 중에도 식사와 급료는 꼭 챙겨야 했으며, 시시때때로 나름의 취미생활에 몰두했고 또 가끔은 변태적인 방법으로 욕구를 충족시켜야 하고, 사태가 아무리 급박해도 폼 나게 출연 세리모니를 하지 않으면 전투에 참가할 수 없다는 시위를 하기도 했다.

<던전키퍼>의 세계에 참여하는 한, 나는 유닛들의 눈치를 봐가며 잠자리를 준비하고 먹이로 쓸 병아리를 사육하며 엉뚱한 짓을 하고 있는 유닛들을 감시하거나 체벌하며 날짜에 맞춰 급료를 마련해야 한다. 어떻게 이겼는지도 모르게 이기거나 어떻게 졌는지도 모르게 지는 경우가 허다한 이 게임 안에서, 나는 그저 게임에 참가하는 또 다른 유닛―물론 다른 유닛과는 차별되는 중요한 특권들이 주어지지만―에 지나지 않는다.


상상을 통해 전취된 세계라고 해서,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 상상의 세계에도 질서가 있고 논리가 있으며, 규칙이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 질서, 논리, 규칙 그리고 규율이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곳의 그것일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상상을 통해 얻는 것은 다른 세계의 그림이 아니라, 다른 세계의 ‘이치’이다.

게임은 소의 턱 밑에 염소 수염을 달고, 그 머리에 사슴뿔을 달며, 뱀의 몸뚱이에 잉어 비늘을 입히는 식의 상상을 요구하지 않는다. 세상을 움직이는 전혀 새로운 이치, 게임은 그 동안 당연한 것들 속에 묻혀 그 얼굴조차 제대로 드러내지 못했던, 새로운 삶의 이치를 상상하기를 요구한다.

과장된 표현이지만, 분명히 게임에는 ‘세계를 혁명하는 힘’이 있다. 그것은 우리의 의식을 깨워, 낡고 병든 혹은 케케묵어 곰팡이 내 나는 이 세계의 질서, 논리, 규칙 그리고 규율을, 상상적으로 전복하기 때문이다. 게임은 세계를 흔든다. 그것은 이 세계의 질서, 논리, 규칙 그리고 규율을 사보타지하며, 우리의 뇌를 두꺼운 뼈와 살갗으로부터 끄집어낸다.


글. 박근서 대구카톨릭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gspark1@cateag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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