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ST 영상미디어연구센터 고희동 박사

KIST 영상미디어연구센터 고희동 박사

가상현실에 생명을 불어넣다

뇌2003년6월호
2013년 01월 09일 (수)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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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컴퓨터 프로그래머는 하늘의 별을 따달라는 애인을 위해 별 따는 프로그램을 만드느라 골몰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21세기의 과학자들은 아예 태양계 전체를 가상공간 안에 끌어와 직접 우주에서 별을 따는 시뮬레이션을 가능하게 하지 않을까. 80년대를 컴퓨터와 로봇의 시대라고 한다면 90년대는 유전공학과 인터넷의 시대였다. 그리고 21세기는 뇌와 가상현실이 과학 분야의 최대 이슈로 부상하는 시대. 비트로 이루어진 가상현실에 생명을 불어 넣는 작업을 생의 업으로 삼은 한 과학자를 만났다.







덜컹거리는 달구지를 타고 천년 전에 사라진 서라벌 최대의 다리 금천교를 지난다. 나른한 햇살이 내리는 오후, 기분 좋은 진동을 일으키며 달리는 달구지에서 시원한 바람을 맞는다. 어느새 달구지가 비행선으로 변하여 서서히 이륙한다. 비행선은 서라벌 상공을 유영하면서 시가지 전체를 조망한다. 저 아래 수많은 골짜기와 산줄기 사이로 호국 불교의 꽃을 활짝 피웠던 신라왕국의 절과 석탑, 석불이 자리잡고 있다. 비행선은 신라 시조 박혁거세가 태어났다는 경주 남산을 지나 삼국통일의 기념물인 거대한 인공연못 안압지에 살짝 내려앉았다. 연꽃이 만발한 안압지에 찰랑, 파문이 인다.

이번에는 신라시대 삼보三寶의 하나로 일컬어지는 황룡사 9층목탑이 건축되는 장관이 3차원 시뮬레이션으로 펼쳐진다. 기둥과 뼈대가 잡히면서 순식간에 아홉 개의 층이 건축되는 입체영상 속에서 지금은 불타 없어진 9층목탑이 웅장한 기상으로 서 있다.


천년 전 서라벌로의 시간여행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영상미디어연구센터 가상체험관에서 기자는 천년 전의 신라로 시간여행을 떠났다. 이 특별한 여행을 끝내고 현재로 돌아왔을 때, 기자의 마음에 이전에는 없던 감정 하나가 생겼다. 그것은 역사시간에 교과서로 배운 신라의 인상과는 사뭇 다른,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천년 고도古都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이었다.

이 가상현실(VR, Virtual Reality)은 이미 ‘2000 경주 세계문화엑스포’에서 공개돼 약 1백75만 명이 ‘서라벌의 숨결 속으로’ 여행을 다녀왔다. 당시 70억 원을 들여 세계 최대, 한국 최초의 가상현실 전용극장을 설립, 최첨단 VR기법으로 신라시대 경주를 재현했을 때, 국내외의 관람객들은 가상현실이 선사하는 꿈의 세계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특히 제작팀은 관람객들이 경주 남산에 올라 소나무 숲에서 솔향기를 맡고, 말발굽 소리와 천둥 번개를 실제 상황처럼 느낄 수 있도록 오감을 자극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고 한다. 무선 LCD안경을 쓴 관람객들은 실제 움직이는 것과 거의 같은 체험을 하며 가상현실이 선사하는 생생한 영상을 즐길 수 있었다. 특히 안압지에서 3차원 영상으로 날아오르는 나비떼의 향연은 어린이들이 나비를 잡기 위해 일어나 손을 뻗을 정도로 압권이었다고.  

이 작업을 주도했던 KIST 영상미디어연구센터 고희동 박사는 “스크린 사이즈만 폭 27미터, 높이 8미터에 달하고 좌석이 6백51 개나 되는 세계에서 가장 큰 몰입공간을 만들었습니다. 초대형 라운드 스크린, 서라운드 입체음향, 인터랙티브 몰입형 스테레오를 이용해 관람객들이 경주의 시가지를 거닐고, 신라시대 문화유적을 답사하는 형태의 가상현실시스템이었죠. 당시 여러 주제영상관 중 관람객 67%가 가장 좋았다고 평가할 만큼 호응이 대단했습니다”라고 설명했다.

이 주제영상관은 기존의 영상관보다 조도를 20배 밝게, 스크린의 크기도 4배까지 확대하는 등 세계 최초의 디지털방식 입체영상관으로, 당시 영상투사 방식에서도 세계 최초의 기술로 인정받았다. 이 작업을 계기로 처음으로 첨단과학과 문화가 결합된 가상현실 문화영상물이 제작되었고, 문화재를 디지털로 복원하는 새로운 장이 열리게 되었다.


문화재 복원·교류 작업에 관심







고박사가 VR기법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91년 말 대전엑스포 때 KIST휴먼로봇센터에서 꿈돌이 로봇을 출품할 때 그래픽 작업에 참가하게 되면서부터. 이후 97년 국내에서 개발한 가상스튜디오시스템을 문화방송 대통령 선거 투개표 방송에 활용하는 등 주목을 받아왔다.

가상현실은 컴퓨터 그래픽이나 영상물에 입체성을 구현하는 3차원(3D) 입체영상을 통해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환경을 마치 실제하는 것처럼 느끼게 하는 기술을 말한다. 입체영화처럼 단순히 보고 느끼는 데 그치지 않고 체험자가 직접 그 영상 속으로 들어가 현실과 다름없이 체험할 수 있는 것이 장점이다. 가상현실 속에서는 전후 좌우와 상하로 움직이면서 대상물을 관찰할 수도 있고 사물을 움직이게 할 수도 있다. 특수 장갑을 끼면 실체처럼 만질 수도 있다. 그 용도는 멀티미디어보다 훨씬 앞서 산업분야를 비롯해 의학치료, 교육, 훈련, 예술, 문화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분야에 걸쳐 있다. 이러한 무한한 응용가능성 때문에 현재 선진국을 중심으로 기술개발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특히 주입식 교육을 체험식 교육으로 바꿀 수 있어 학교교육에도 혁명적인 변화를 몰고 올 것으로 예상된다. 고박사는 “3, 4년 뒤에는 초고속망을 이용한 가상현실 원격 회의도 등장해 바로 앞에 있는 사람과 실제로 회의를 하는 것처럼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러한 가상현실 구현작업 중 고박사가 특히 관심을 갖는 분야는 문화유적을 지원하는 3차원입체영상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물리, 화학 그리고 생물학적인 처리를 통해서 문화재를 유지 보수해왔지만 이를 디지털화하여 VR기술로 재생하면 현재의 모습 그대로 영구히 남길 수가 있게 된다. 천년 뒤의 후손도 우리의 소중한 유산을 현재와 똑같은 모습으로, 똑같은 감동으로 체험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아울러 사라진 문화를 복원하는 것도 가능하니, 오히려 현실에서보다도 더 많은 것을 가상현실 속에서 창조해 낼 수 있는 셈이다. 이를 위해 문화재의 삼차원 입체영상을 추출해내는 레이저스캔작업과 기초원천기술시스템 개발에 몰두하고 있다.

더 나아가 국제적인 디지털 문화유적 교류작업도 진행 중이다. 현재 이탈리아, 독일, 그리스 등 유럽 연구소와 연계하여 초고속망을 이용한 문화유적 교류시스템을 공동으로 진행하고 있다. 작업이 구체화되면 지구촌 어느 곳에서나 입체영상시스템을 통해 한국의 고유한 문화유적을 실시간으로 소개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다른 나라의 문화 또한 언제라도 한국에 앉아서 체험할 수 있게 된다. 한마디로 실시간 문화교류가 가능한 시대가 열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가상현실을 재현하는 데는 어떤 과정이 필요할까. 고박사는 “가상현실에 몰입하는 데는 시각적인 요소가 중요합니다. 시각차가 커야 몰입감을 확실히 느낄 수 있기 때문에 우선 대형화면과 1백50도 이상의 넓은 시야각이 필요하죠. 그리고 공간에 실제로 존재하는 인상을 주기 위해서 시각뿐 아니라 청각, 촉각, 후각 등을 자극하는 장치가 필요하고, 가상공간에서 체험자가 행동을 하면 즉각 반응이 일어나도록 설계해야 합니다. 실제 상황과 얼마나 가깝게 재현하느냐가 가상현실의 실제감을 증대시키는 요인들이지요. 따라서 굉장히 복잡한 시스템을 요구하고, 그 복잡성을 관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체험자에게는 실감나는 모험이겠지만, 작업 자체가 녹록치는 않겠다 했더니, “물체를 관찰할 때 망막에 맺히는 상을 컴퓨터로 계산하는 작업이 가상현실 기술의 핵심인데 원리는 간단하지만 엄청난 계산과정을 거쳐야 하는 지난한 작업”이라고 수긍했다.  


과학과 문화가 만나는 가상공간







그런데 가상의 공간을 구현하는 공학적 기술보다 더 필요한 것은 컨텐츠라는 것.  “컨텐츠야 말로 국가경쟁력입니다. 가상현실을 실제처럼 느끼기 위해서는 많은 아이디어가 필요하기 때문에 기존의 기계공학, 전산 등의 공학 분야뿐 아니라 리얼리티를 살리기 위한 심리학, 예술적인 면을 고려한 효과적인 연출 등 다양한 분야가 동원되어야 합니다. 훌륭한 기술도 컨텐츠를 잘 만나야 빛을 발하는 것이죠.”

‘사이버 난타’ 체험관도 예술과 과학의 접목을 시도한 컨텐츠 중 하나. 원격으로 여러 사람이 공간을 초월해 협연할 수 있는 가상공간인데, 과학기술이 예술가들에게 더 많은 표현의 자유를 제공하는 셈이랄까. 

“사이버 난타는 가상현실이 실용적인 목적 이외에 예술가들에게 음악적 상상력을 제공하는 공간으로 활용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이죠. 이것을 단순히 흥미있는 아이템 정도로 생각할 수 있지만, 기술적으로 상당히 복잡한 작업이 요구되는 컨텐츠입니다. 앞으로 오케스트라 협연을 네트워크상에서 원격으로 실연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라고 설명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가상현실은 현실과는 동떨어진 영역으로 인식되기 쉽다. 그러나 과학자는 무한히 현실에 근접한 가상공간을 꿈꾼다.

“앞으로 가야 할 길이 멀지만, 가상현실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이 저의 바람입니다. 경주 엑스포에서 서라벌의 옛 시가지를 재현했을 때는 컴퓨터의 성능이 따라주지 않아서 건축물과 거리를 표현하는 정도에 머물렀어요. 하지만 앞으로는 가상공간에 신라인들이 걸어 다니고, 체험자가 역사 속의 인물과 직접 대화도 할 수 있는 동적인 공간을 재현하고 싶습니다. 그러려면 인공지능이나 인공생명 분야와도 연계가 되어야 하겠죠.”

그렇다면 가상현실이 언제쯤이나 우리에게 친근한 현실이 될 수 있으려나. 고박사는 “스타트랙에서 휴식공간으로 사용되는 홀로데크같은 것을 구현하려면 백 년 이상이 걸릴 수도…”라며 웃는다. 물질은 나눌수록 줄어들지만 비트로 이루어진 정보가 주는 감동은 나눌수록 커질 것이다. 고박사가 만드는 가상현실이 기계가 중심이 된 딱딱하고 건조한 세계가 아니라 인간 냄새나는 ‘촉촉한’ 공간이어서 마음이 놓인다.

글│전채연 missingmuse@powerbrain.co.kr
사진│김경아
자료제공│한국과학기술연구원 영상미디어연구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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