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뇌교육자 세종 vs 국가과학자 장영실]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 중 항상 1위에 오르내리는 세종이 조선의 네 번째 왕으로서 재위해 있던 때는 그 어떤 시대보다 수많은 업적과 기라성 같은 인재들이 넘쳐났던 시기였다.
훈민정음의 창제에서부터 과학, 음악, 문화영역의 황금기를 일구었던 데에는 재능을 발굴하고 인재들이 자신의 뇌의 가치를 제대로 발휘할 수 있게 한 뇌교육자로서의 리더십이 바탕이 되었다.
인재의 발굴과 개발 중시한 교육자
세종 재위 32년의 시간은 세종이 발굴한 인재들이 그들이 가진 재능을 마음껏 꽃피운 시기였다고도 할 수 있다. 세종은 전국 방방곡곡을 통해 재능 있는 인재들을 찾았고,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중용하였다.
세종은 ‘인재가 길에 버려져 있는 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의 수치’라고 믿었다. 그는 모든 사람은 제각기 재주를 갖고 있다고 믿었고, 그 재능을 알아보는 눈을 키우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세종은 즉위 후 이름뿐이던 집현전을 조선 최고의 학문기관으로 올려놓아 재능 있는 소장학파들을 발굴하고, 그들이 관료들에게 휘둘리지 않도록 커다란 바람막이 역할을 겸해 최상의 환경을 조성해주었다.
더불어 관료사회와 연계되는 길도 열어줌으로써 또 다른 성장의 길을 마련했다. 집현전은 그가 이루고자 했던 꿈과 비전의 주춧돌이었고, 이후 학문적 성취를 이루려는 모든 선비들의 바람으로 자리 잡았다. 국가 인재양성을 위한 시스템을 마련한 것이다.
이외에도 세종은 자기계발을 위해 사가독서제도도 도입했는데 오늘날로 치면 ‘유급휴가 제도’라고 할 수 있다. 스스로 좋아하는 것에 한없이 몰입하고픈 학자들의 바람을 충족시켜주고자 하는 마음이 담긴 정책이다.
또한 세종 15년에는 어린 학생들을 선발해 중국에 유학을 보낼 만큼 국제적 인재양성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선발 당시에 평민 출신의 중용도 배제하지 않았을 만큼 신분의 귀천을 가리지 않았다. 이러한 인재중시와 양성에 관한 통치철학으로 세종 재위 시절 조선은 전국이 거대한 대학 캠퍼스나 다를 바 없었을 만큼 교육이 나라의 근본을 이루었다.
개개인의 두뇌 재능을 꿰뚫어보는 통찰력의 소유자
세종 시대에 인재들이 넘쳐나고 그 인재들에 의해 많은 업적들이 나타난 것의 바탕에는 그들의 재능을 꿰뚫어보는 세종의 통찰력이 있었다. 그것이 근간이 되어 적재적소에 인재를 배치할 수 있었고 명을 받은 이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능력을 최고로 발휘했다.
조선의 대표적 명장인 김종서는 태종 시절 이름도 없는 관직에 머물다가 쫓겨났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세종은 왕위에 오르기 전, 김종서의 공평무사함을 눈여겨보고, 그에게 백성을 감찰하는 일을 맡겼다. 이후 그는 북방의 여진을 격퇴하고 6진을 개척하는 큰 업적을 일궜다.
재능 있는 인재를 발굴하는 데는 출신도 상관없었다. 조선을 넘어 역사상 가장 뛰어난 과학자로 수많은 발명품들을 쏟아내었던 장영실은 관노에 불과한 비천한 신분이었지만 세종에게 발탁되어 중국 유학을 다녀오고 정3품의 지위까지 올랐다. 또 영의정을 18년이나 지내며 청백리로 이름난 황희는 서얼 출신이었다.
세종은 늘 신하들의 재능을 살펴보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처조카이자 조선의 대표적 문신인 강희안은 24세에 정인지 등과 함께 한글 28자에 대한 해석을 상세하게 달고, 용비어천가의 주석을 붙일 만큼 뛰어난 인물이었다.
하지만, 어릴 적부터 개인의 영달에는 관심이 없고, 욕심도 없었으며, 남 앞에 나서는 것도 싫어했다. 시·서·화에 모두 능하여 ‘삼절’이라고 불릴 만큼 뛰어난 재능을 지닌 강희안을 눈여겨본 세종은 그에게 원예서를 만들라는 명을 내린다.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원예서로 꼽히는 《양화소록》은 그렇게 탄생되었다. 당시 강희안은 직접 화초를 키우면서 알게 된 화초의 특성과 재배법 등을 이 책에 자세하게 기록했다. 이 책이 특별한 것은 단순한 원예서를 넘어 자연의 이치와 천하를 다스리는 수신치국의 내용을 담고 있다는 점이다. 세종에 의해 강희안 만의 보석 같은 재능이 꽃피워진 셈이다.
백성을 위한 마음이 만든 음운학의 대가
재위 25년째 되던 1443년 12월, 조선 조정을 발칵 뒤집는 일이 발생했다. 세종이 정인지, 최항, 박팽년, 성삼문, 이개, 이선로, 강희안 등 소장학자들과 함께 철저히 비밀리에 추진했던 훈민정음이 비로소 그 실체를 드러낸 것이다. 훈민정음의 발표는 최만리를 비롯한 집현전 대표학자들조차 발표시점까지 그 골자를 보지 못했을 만큼 전격적인 사건이었다.
대부분의 조정대신들은 즉각 반대에 나섰고 집현전의 많은 학자들도 반대 여론에 참가했다. 그만큼 새로운 문자의 창제는 당시 사회에 많은 문제점들을 만들어낼 소지가 있었다.
하지만 세종은 숱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3년 후인 1446년 훈민정음을 정식으로 반포했다. 훈민정음은 백성을 위한 것이라는 변할 수 없는 원칙으로 세운 것이었기에 세종은 결코 물러설 수가 없었다.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세종 자신이 당대 최고의 음운학자였다는 점이다. 백성을 위한 독자적 문자의 필요성을 느꼈던 세종은 오랜 기간 음운론에 관해 수많은 서적을 섭렵했고, 반대했던 학자들을 꼼짝 못하게 할 만큼 뛰어났다.
이는 당시 훈민정음의 반포에 크나큰 장점으로 작용했다. 한글의 태동기로 보는 세종 즉위 10년부터 그는 고어를 연구하고 음운론 공부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며 스스로 전문가로 성장했다. 백성을 향한 마음이 그의 재능을 한 단계 도약시킨 셈이다.
뇌의 근본가치를 추구한 성군
인재의 발굴과 등용, 저마다의 재능을 일깨운 통찰력, 큰 가치를 위한 공적인 비전 등 세종은 단순한 군주를 넘어 뛰어난 뇌교육자였다.
그는 재능을 발굴하고 키우며, 학문을 대중화시키고, 뛰어난 인재를 나라의 근간으로 삼았다. 세종의 교육관은 단순한 지식전달 위주와 획일적인 교육, 하향평준화 등 오늘날 겪고 있는 교육의 문제점들에 대한 해결책이 어디에 있는가를 보여주는 선조의 가르침이기도 하다.
교육이란 것이 단순히 지식을 배우고 축적하는 것을 넘어서 뇌가 가진 최고의 가치를 실현하는 것임을 세종은 이미 알았던 셈이다. 한 나라의 수장으로서, 교육자로서 인간의 뇌가 가진 근본 가치를 꿰뚫고 있었던 것이다.
세종이 왜 우리 역사에서 으뜸으로 손꼽히는 성군인지 새삼 돌이켜볼 일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나라와 민족이 번성하는 길은 ‘교육’에 있으며, 그 해답은 ‘뇌’에 있기 때문이다.
글· 장래혁 editor@brainmedia.co.kr
자료·《대왕 세종》(백기복 저, 크레듀) | 영화 ‘천문’
[Box] 유네스코 세종대왕 문해상 UNESCO King Sejong Literacy Prize
1989년에 제정돼 1990년부터 시상해오고 있는 상으로서 매년 9월 8일(문해의 날) 시상한다. 유네스코 각 회원국 대표나 관련 기관 등의 추천을 거친 후 유네스코 사무총장이 위촉한 심사위원들의 심사로 매년 수상자가 결정된다.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 정신을 전 세계에 알리고, 개발도상국에서의 모국어 개발 등을 통해 전 세계적 문맹 퇴치에 기여한 개인 및 단체를 장려하기 위해 대한민국 정부의 지원으로 수상자에게는 상금 2만 달러와 상장, 세종대왕 은메달을 수여하며, 시상식은 매년 9월 8일 ‘세계 문해의 날(International Literacy Day)’에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