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민 장군, 그의 죽음에 통곡하다!

김시민 장군, 그의 죽음에 통곡하다!

단군문화기획 91편 충무공 김시민 장군과 진주성 전투

김시민 장군과 조일전쟁(임진왜란)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수많은 조선군이 왜군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진주성. 이곳에서 V자를 그리면서 사진을 촬영하는 그들의 후손들을 본다. 이곳은 관광지 이전에 순국성지(殉國聖地)다. 성지를 어떻게 기리느냐에 따라 문화재의 의미도 달라진다. 역사를 지식이 아니라 한국인의 정신(korean spirit)으로 봐야 하는 이유다.

경상남도 문화재 1호가 김시민장군전공비다. 김시민은 진주가 고향이 아니다. 1554년(명종9)에 천안 목천현에서 태어났다. 25살에 무과에 급제한다. 1592년 왜군이 조선으로 쳐들어온다. 그는 진주목사가 됐다. 10월에는 불과 3,800명의 군대로 왜장 하세가와(長谷川秀一)가 이끄는 2만의 군대를 맞아 대승을 거두었다. 조일전쟁 3대 대첩 중의 하나인 진주대첩이다. 그러나 김시민은 적의 총탄을 맞고 39세의 일기로 순국한다. 나라에 무공을 세워서 죽었으니 충무공이다. 국가로부터 또 다른 충무공을 시호(詩號)로 받은 장수로 이순신(李舜臣), 남이(南怡), 정충신(鄭忠信) 등이 있다.

▲ 진주성에 있는 충무공 김시민장군 동상(사진=윤한주 기자)

중앙과 현장의 정보가 다르다

주목되는 것은 그에 대한 기록이 다양하다는 점이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이하 실록)>은 김시민의 기록이 단편적으로 나온다. 류성룡의 <징비록(懲毖錄)>은 어떨까? 개인이 저술한 초본과 나중에 인쇄된 간행본이 있다. 초본에는 진주성 전투에 승리한 기록만 있고 김시민은 없다. 16권본 뒤에 간행된 2권본 징비록에야 나온다. 

반면 경상우도인 함양 일대에서 의병활동을 벌인 고대(孤臺) 정경운(1556~?)이 펴낸  <고대일록(孤臺日錄, 이하 일록)>에는 김시민에 대한 기록이 구체적이다. 그는 1592년(선조 25년) 4월 23일부터 1609년(광해군 원년) 10월 7일까지 조일전쟁이 끝난(1598년) 10여년의 상황을 기록했다. 이 기록은 이순신의 <난중일기>, 황윤석의 <이재난고>, 오희문의 <쇄미록> 등과 함께 귀중한 자료로 손꼽힌다.

<일록>에서 김시민은 1592년 6월 3일(신묘)에 등장한다.

“적이 와서 진주의 남면(南面)을 침범했으나, 감히 접근하지 못하는 것은 판관 김시민이 능히 한 지방을 통제하고 있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이보다 앞서 목사(牧使) 이경이 병으로 피신처에서 사망하니, 김시민이 진주 지방의 사민(士民)을 규합하여 성벽을 고치고 병기를 수리하여 방어할 계책을 마련해 놓고 있었다.”

9월 6일에는 왜적을 대패시킨다. 적을 토멸한 것은 최초라고 밝혔다.

“진주 목사 김시민이 김산군의 서쪽에서 왜적과 전투를 벌여 대패시켰다. 처음 김시민이 정예병 1천 명을 거느리고 군의 서쪽에 진을 치고는 철환 80통을 가지고 일시에 돌입해 비가 퍼붓듯이 활을 쏘고 총을 발사하니, 적들이 완전히 궤멸되어 그들 무리의 울부짖는 소리가 하늘에 잇닿았다. 13급(級)의 목을 베었고 화살에 명중한 자는 수백여 명에 달했다. 거의 적을 섬멸할 즈음 개령(開寧)의 적들이 급한 소식을 전해 듣고는 들판을 덮을 정도로 몰려왔다. 김시민은 적들이 습격할 것을 우려해 일단 대방연으로 후퇴하니, 병사들의 함성이 크게 진동했다. 수령(守令)이 적을 토멸한 것은 김시민이 처음이다.”

▲ 김시민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1604년에 선조 임금이 내린 선무공신교서를 비롯해서 조일전쟁 유물이 많은 국립진주박물관(사진=윤한주 기자)

김시민 장군의 전사기록

진주성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배경 또한 <실록>보다 구체적이다. 

“김시민은 통판(通判)으로 재직할 때부터 사졸을 휴양(休養)하여 하나같이 은혜를 베풀었기 때문에, 진주 사람들이 부모와 같이 사랑했다. 위아래가 혼연일체가 되어 전혀 갈등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을 전쟁에 동원해도 이기지 않음이 없었고, 성을 지키게 해도 수비하지 못하는 경우가 없었다. 사람들이 모두 그를 간성(干城)의 장수로 간주했다. - 일록 1592년 11월 22일” 

특히 김시민의 죽음에 대해 <실록>은 “김시민(金時敏)을 경상 우병사로 삼았는데, 얼마 뒤에 졸(卒)하였다. - 1592년 10월 1일”라고 남긴 것이 전부다. 김시민이 어떻게 전사했는지 알 수가 없다. <일록>은 김시민의 죽음을 슬퍼하는 진주사람들을 구체적으로 기술했다.

“큰 승리를 거둔 뒤에 적의 총탄에 맞은 곳이 날로 더욱 심해져서, 그 정신이 혼미하고 어지러워져 사람들이 모두 대단히 걱정하였다. 21일 머리를 빗고서 옷을 갈아입으니 병이 약간 나은 듯했으나, 다음 날 병이 심해져 결국 사망하고 말았다. 진주 사람들이 어른, 아이 모두가 통곡하여 밤까지 이어졌으니, 마치 자신의 부모님 상喪과 같이 하였다. - 일록 1592년 11월 22일”

이처럼 전쟁에 관해서 기록의 차이가 컸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또한 후대까지 <실록>의 단편적인 기록에 의지했기 때문에 김시민을 제대로 알 수 없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일록>을 통해 김시민은 뛰어난 무장 이전에 백성을 누구보다 사랑한 지도자였다. 그를 따르고 순국한 선열들의 정신은 오늘날 진주유등축제와 단군제사로 시작하는 개천예술제로 이어졌다고 생각한다.

한편 국립진주박물관에는 선조임금이 김시민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1604년에 선조 임금이 내린 선무공신교서(보물 1476호)이 있다. 김시민을 선무공신 2등에 녹훈한다는 것과 공적에 대한 찬양, 포상 내역 등이 있다. 당시 조일전쟁과 관련한 유물과 무기류, 거북선 등이 전시되어 있다.(계속)

■ 진주성 찾아가는 방법

경상남도 진주시 본성동 055-749-248
 (바로가기 클릭)

■ 참고문헌

조선왕조실록
정경운, (역주) 고대일록, 태학사 2009
[김시덕의 임진왜란 열전] 김응서 vs 고니시 유키나가①  조선일보 2015. 7. 3. 
민덕기, 임진왜란기 정경운의『고대일록(孤臺日錄)』에서 보는 아래로부터의 문견(聞見)정보: 실록(實錄)의 관련정보와의 비교를 중심으로. 한일관계사학회 제25집, 한일관계사학회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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