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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에게 점령당한 대궐의 동궁東宮인 창경궁昌慶宮 정문. 일제가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고쳤다. 6.25사변이 발발했을 때엔 창경궁 앞길로 북한군의 탱크가 무한궤도無限軌道를 굴리며 들어왔다
우모는 사라졌다. 사람들은 내가 1900년대로 흰 버펄로를 타고 왔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눈에 보이지 않았던 듯싶었다.
“공은 누구를 찾고 계시오?”
군중 속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구경이나 하러 왔습니다.”
“구경이나 하러 왔다고요?”
목소리는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나는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건장하게 생긴 사내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사진에서만 보았던 사람이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여순 감옥에서 사형을 당하여 죽은 사람이었다. 그가 영계를 초월하여 1910년에 동궁 앞에 와 있는 것이었다. 그는 내 얼굴을 때렸던 그 호외를 들고 있었다. 그가 호외를 내 얼굴을 향하여 날린 것 같았다.
“나로 말하면 당신과 이름이 똑같은 안중근이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험한 세상엔 왜 온 거요?”
“의사님을 만나러 왔습니다.”
“죽기 전의 나를 만나려는 것이요? 죽은 후의 나를 만나려는 것이요?”
“둘 다.”
“좋소.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아시오?”
“나라가 수치를 당한 날이군요.”
그는 내게 책 한 권을 주었다.
“내가 보니 공이 나에 대하여 쓴 자서전을 읽고 있었소. 그러나 그 자서전은 복사라 오류가 있소. 내가 지금 주는 것은 내가 손수 쓴 진본이요. 그러니 진본을 참고로 하시오.”
“진본을 주셔서 고맙습니다.”
나는 그가 주는 진본을 받았다.
“혹시 약주를 하실 수 있습니까?”
나는 그와 헤어지는 것이 아쉬운 생각이 들어 물어보았다.
“할 수야 있지만 내가 죽은 후로 마셔 보지 않아서 마셔질지 의문이요.”
“그렇다면 실험 삼아 마셔 보시지요. 제가 시청 옆 동네에 살아서 북창동의 청국인 거리를 잘 알고 있습니다. 거기에 가셔서 배주에 청요리 하나 시켜 놓고 한잔 하시죠.”
우리는 종로로 나와서 태평로로 들어와 내가 어려서 보았던 북창동을 찾아갔다. 북창동 거리가 내가 어려서 보았던 그대로 가상공간假想空間으로 재현되어 있었다. 중국집으로 들어가니, 중국인 남자가 문 옆의 계산대 안쪽에 앉아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중국인 남자가 인사하였다. 중국인 남자는 나와 안중근 의사를 홀 한쪽에 앉도록 해 주었다.
“드시고 싶으신 것이 있습니까?”
중국집 주인이 물었다.
“마음에 드는 것을 시키시지요.”
내가 안중근 의사에게 말했다.
“없소. 아무거나 시키시오.”
나는 배주 1병과 양장피 1접시를 주문하였다. 나이 든 중국인 주인이 배주 1병과 양장피가 든 접시와 따장과 양파가 든 작은 접시를 놓고 갔다.
“만나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살아 있는 인간이 돌아가신 의사님을 만나 약주 한 잔 대접하는 일이 전무후무한 일일 것입니다. 의사님과 제가 아니라면 불가능할 것입니다.”
나는 안중근 의사의 작은 배주 잔에 배주를 따랐다. 안중근 의사도 나의 잔에 배주를 따라 주었다. 우리는 배주를 마셨다.
“옛날에 청국인을 지나인이라 불렀는데, 요즈음은 중국인이라 부른다지?”
“그렇습니다.”

▲ 안중근 의사와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
나는 사람들이 오가는 거리를 내다보았다.
“6.25사변이 나기 전에 여기에서 시청 쪽으로 나가면서 로터리 쪽에 공장지대가 있었습니다. 철공장지대라고 했던 동네입니다.”
“나는 황해도 시골 사람이라 이쪽 사정은 알지 못하네.”
“그러시군요. 저의 외할아버지가 하시던 목공장이 공장지대 외곽에 있었습니다. 그때는 송판松板으로 포장용 궤짝을 짰습니다.”
“내가 한성에 왔을 때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치렀을 때였어. 그때는 공장 같은 것이 없었지.”
“의사님과 저 사이에 시대 차이가 있군요.”
“그렇지. 시대 차이가 있지. 기억나는 것이 있으면 이야기해 보게.”
“나라가 일제에게 망한 후에 저의 외조부께서 독립군이 되겠다고 기차를 타고 신의주로 가다가 일본 형사에게 잡혀 오셨다고 합니다. 이 말은 제가 외할아버지에게서 직접 들은 말입니다.”
“그다음에 또 탈출하셨나?”
“늘 형사가 따라다니니까 아무 일도 하지 못하고 궤짝공장을 시작하셨어요.”
“친조부께서는?”
“친조부는 돌아가셔 아니 계셨습니다. 아버지도 돌아가셔 안 계셨습니다.”
“그대가 살아오느라고 고생 좀 했겠네.”
“제가 고생한 것이 아니라 어머니가 젊은 과수댁으로 고생하셨지요.”
안중근 의사는 무엇을 생각하는지 머리를 끄덕거렸다.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말해 보게.”
“일제강점기를 산 사람을 친일분자로 몰아야 할까요?”
“그래서야 쓰겠나? 혹시 그대가 그런 사상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무엇이든 도가 지나치면 좋지 않아.”
“하긴…….”
우리는 잠깐 말하는 사이에 배주를 다 마셔서 1병을 더 시켜야 하였다. 우리는 또 마셨다. 나는 취기가 오르기 시작하였다.
“안응칠역사의 서문을 읽으니까, 1909년 10월 26일 (음력 9월 13일) 상오 9시 반, 하얼빈 역 앞에서, 한국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 저격한 후, 여순 감옥에 수감 중에, 그해 12월 13일 (음력 11월 1일)에 집필하기 시작하여, 이듬해 1910년 순국하시기 10일 전인 3월 15일 (음력 2월 초5일)에 탈고하셨더군요. 무릇 93일 동안 집필하신 것입니다.”
“그대가 나보다 기억력이 좋군.”
“요 며칠 사이에 읽었으니까 기억에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렇겠지. 내가 죽은 후에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가, 그로부터 59년이라는 오랜 기간이 흐른 후에, 우연히 한 역사가가 발견하여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지. 세상에 알린 사람이 누구던가?”
“최서면이라는 사람입니다. 동경한국학연구원장이더군요. 그분이 1969년에 발견하여 1년 동안 번역하여 간행했습니다. 의사님께서 제게 진술하는 셈 치고 의사님의 일대기를 말씀해 주시지요. 듣고 싶습니다.”
“지루할 텐데…….”
“괜찮습니다.”
“그대가 원한다면 내가 이야기해 주지. 나는 1879년 기묘 7월 16일에 대한제국 황해도 해주부海州府 수양산 아래에서 태어났네. 성은 안安이요, 이름은 중근重根, 자字는 응칠應七일세.”
그는 진술을 이렇게 시작하였다.
“나의 가계는 조부가 진해현감鎭海縣監을 지낸 인人자 수壽자로 불리는 분이었네. 벼슬이 비록 현감에 머물렀으나, 성품이 어질고 무거운 분이었네. 살림이 넉넉하여 도내에서 자선가로 널리 알려진 분이었어.”
“가풍이 엄격했겠습니다.”
“그렇지. 나는 조부의 뜻에 따라 서당에 입학하여 배웠네. 8, 9년을 공부하면서 보통 학문만을 배우는 데 그쳤는데, 학문에 뜻을 두지 않고 초패왕楚覇王 항우項羽와 같은 영웅이 되려는 데에 뜻을 두고 있었네.”
“결과는 뜻을 이루지 못하셨지요.”
“그래서 천추千秋의 한恨으로 남았어.”
안중근 의사의 나이 14세가 되던 해에 조부가 돌아가셨다. 그가 세상에 태어난 1879년부터 인수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던 1903년까지의 기간 동안 조선과 일본은 열강들의 등쌀에 싫든 좋든 세계사의 전면에 노출되지 않을 수 없었다. 세계사의 전면에 노출되었지만 두 나라가 걸어간 길은 판이하였다. 일본은 근대화와 공업화에 성공하면서 열강의 대열에 들어섰고, 조선은 나라의 문을 닫고 쇄국하다가 강제로 열강들이 문을 열어 놓는 바람에, 외세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패망의 길로 들어섰다. 어떤 학자는 성리학을 국가이념으로 채택하여 500년을 통치해 온 폐쇄주의와 사대주의가 이 나라를 망쳤다고 하였다.
일본이 메이지유신에 성공하자, 국내가 정한론으로 시끄러웠다. 정한론을 주장하던 사이고오 다카모리가 ‘정한征韓의 시기상조론時機尙早論’을 들고 나온 오오쿠보 도시미찌에게 밀려 실각하였다. 사이고오 다카모리는 비록 메이지유신의 주역이긴 했으나, 아직도 사무라이의 기질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사람으로, 유신으로 몰락한 사무라이들의 숭배를 받으며 정신적인 지주 역할을 하였다.
실각에 반발한 사이고 다카모리가 ‘사쓰마 반란(薩摩反亂)’을 일으켰다. 사무라이에 향수를 느끼는 자들이 그의 휘하에 몰려들 수밖에 없었다.
일본은 서남전쟁(西南戰爭, 1877年 2月—10月)에 휘말리고 말았다. 정부군은 상급 무사니 하급 무사니 하는 사무라이의 엄격한 신분제도가 타파된 후에 입대한 평민 병사들로 편성되어 있었다.
사무라이 시대의 진대 편제와 명치유신의 사단 편제는 마치 구한국군의 진대 편제와 요즈음 한국군의 사단편제와 비견된다고 하겠다.
그러나 근대적인 군대로 편제를 바꾸고 새 전술과 훈련을 도입하고, 새로운 무기로 무장한 정부군이 아직도 사무라이의 티를 벗지 못한 수구파들을 이긴다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였다.
싸스마 반란의 치열한 공방전은 규슈의 구마모토 전투에서 결판이 났고, 사무라이 군대는 신식 군대에게 전멸을 당하다시피 괴멸되고 말았다.
몸을 피한 사이고오 다카모리는 그의 고향인 가고시마 성에서 자결로 생을 마쳤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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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가 노중평 |
1985년 한국문인협회 ‘월간문학’에 단편소설 <정선아리랑>이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천지신명>, <사라진 역사 1만년>, <마고의 세계> 등 30여 권을 저술했다. 국가로부터 옥조근정훈장, 근정포장, 대통령 표창장 등을 받았다. 현재 한국문인협회원, 한민족단체연합 공동고문, 한민족원로회원으로 활동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