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치명적인 발목 부상으로 축구만 보고 달려온 시간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됐다. 스물한 살, 꽃다워야 할 청춘에게 인생은 자살을 생각할 만큼 끝없는 절망과 괴로움뿐이었다. 하지만 그때야 비로소 자신이 왜 공부해야 하는지를 깨달았다. 영어 알파벳도 모르던 축구선수에서 독학으로 4년 만에 사법시험에 합격한 이중재 변호사, 그의 공부법이 궁금했다.
영어를 읽지 못하는 대학생
체육 특기생으로 대학에 입학하기 전까지 그의 인생은 탄탄대로였다. 그러나 대학에 들어가서는 사정이 달라졌다. 비행기를 타기 위해 영문으로 이름을 써야 하는데 어떻게 쓰는지 몰라 다른 사람이 대신 써주고, 훈련일지에 프리킥이나 인사이드 같은 용어를 영어로 적지 못해 난처한 경우도 있었다.
또 영어로 쓰인 간판을 찾지 못해 약속을 지키지 못한 일도 있을 만큼 영어로 인한 스트레스와 학과 공부에 대한 중압감은 그를 열등감과 자격지심의 늪으로 몰아갔다.
학과 수업을 따라가려고 단과 학원에서 중학생들과 함께 수학, 물리, 영어 과목을 공부했다. 하지만 운동선수는 공부를 못한다는 편견을 스스로 확인만 한 꼴이었다. 그렇게 자격지심에 빠져 힘들어하고 있을 때 설상가상으로 발목에 큰 부상을 입었다. 일편단심 공만 찼던 이 남자, 고민 끝에 축구를 포기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그때 처음으로 축구를 선택한 것을 후회했다. “축구를 포기할 수밖에 없는 현실 앞에서 왜 내가 축구만 하다가 이런 상황에 처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리고 결심했죠. 앞으로는 그 어떤 것도 포기하지 않겠다고.”
운동선수의 승부욕으로 공부에 도전하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현실에 화가 났고 자살까지 생각했을 만큼 상황은 절망적이었지만 그냥 무너질 수는 없었다. 고민 끝에 얻은 결론은 공부. 비로소 그가 축구를 한다고 했을 때 “축구를 해도 좋지만, 공부는 절대 손에서 놓지 말아야 한다”는 부모님의 말씀이 사무치게 다가왔다.
“제가 축구를 한다고 했을 때 특히 어머니의 반대가 심했는데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엄마 인생에서 가장 후회스러운 게 있다면 배우지 못한 것이다. 무엇을 해도 자신감 있게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고, 도대체 공부를 왜 해야 하는지 이유를 몰랐죠. 공부를 안 해도 축구하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었으니까요. 축구를 포기하고서야 어머니가 하신 말씀의 의미를 뼛속 깊이 이해할 수 있었어요.”
체육 특기생으로 홍익대에 다니던 그는 축구를 접고 괴로워하다 군에 입대했고, 제대 후에는 바로 공인중개사 공부를 시작했다. 그런데 수강생들이 이해하는 것과 상관없이 진도만 나가기 바쁜 학원 수업이 자신과 맞지 않았다. 학원을 그만두고 독학으로 공부를 시작한 지 4개월 만에 공인중개사 시험에 합격하자 그는 자신감이 생겼다. 그리고 민법을 더 깊게 공부하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민법으로 도전할 수 있는 시험 중에서 사법고시를 택했다.
그가 사법고시를 보겠다고 하자 주변에서는 “네가 공부를 해? 더욱이 사법시험을?”이라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주변의 이런 반응에 오기가 발동했다. 도대체 얼마나 어려운 시험이기에 시작도 하기 전에 이렇게 사기를 꺾어놓는지 궁금했다. 축구선수 특유의 승부욕이 고개를 든 것이다.
“그때는 사법시험이 얼마나 어려운지 몰랐어요. 그랬기 때문에 두려움 없이 도전한 거죠. 하지만 아무리 어렵다 해도 포기하지 않은 진짜 이유는 자격지심에서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공부법의 핵심은 ‘왜?’라고 스스로 묻는 것
“축구도, 공부도 제가 좋아하는 걸 한 거예요. 자기가 좋아하는 걸 하면 고된 훈련도, 힘든 공부도 모두 재미있어요. 힘든 줄 모르고 하죠. 그런데 제가 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를 깨닫기 전까지 부모님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남들 다 하는 거니까 공부해야 한다’고 했지 공부해야 하는 이유를 말해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축구는 저 스스로 왜 축구를 해야 하는지 이유를 알았지만 공부를 해야 할 이유는 몰랐어요. 공부를 왜 해야 하는지 알게 되니까 공부하게 된 거예요. 자신이 공부해야 할 이유를 깨달으면 누가 하지 말라고 해도 하는 게 공부인 것 같아요.”
그래도 공부하는 방법도 잘 모르고 공부를 해본적도 없는 사람이 아무리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고 해도 그렇지, 원래 머리가 뛰어난 사람이 아닐까 궁금했다.
“저는 집중력과 몰입력이 강한 사람이 천재라고 생각해요. 임권택 감독이 자신의 다리가 썩는 줄도 모르고 필름을 편집했다는 일화를 들은 적이 있는데, 결국 자기가 좋아하는 일에 얼마나 몰입하느냐가 자신이 이루고 싶은 것을 이루어내는 힘이라고 봅니다.”
그는 공부법과 관련해서 무한반복과 ‘왜’라는 의문의 중요성에 대해 꼭 말하고 싶단다.
“아기가 말을 익히는 과정처럼 제가 공부를 처음 시작했을 때 할 수 있는 방법이라곤 무한반복밖에 없었어요. 계속 반복하다 보면 이해가 되더라고요. 그리고 워낙 기초가 없어서 그랬는지, 늘 ‘왜’라는 궁금증을 갖고 그것을 이해하려고 노력했어요.
어떻게 보면 시간이 많이 드는 방법이죠. 요즘 사람들은 조급한 마음 때문에 무엇이든 빨리 터득할 수 있는 요령만 배우려고 해요. 남들과 똑같은 것 싫어하고 자기만의 개성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희한하게 공부법에서만큼은 남들이 검증하지 않은 방법은 시도조차 하지 않으려하죠. 그리고 무한반복을 한다고 해서 무조건 암기만 하는 것이 아니에요.
반복을 통해 자기 것으로 완전히 이해하는 것이 핵심이죠. 암기 위주의 교육방식은 인간에게서 ‘왜’라는 의문을 빼앗아갔어요. 공부할 때는 ‘왜’라는 의문이 중요한데 이런 과정을 생략하고 쉽게 암기하고 쉽게 생각하려고만 하죠. 이렇게 누군가 제시해준 것 이상으로 생각하려 들지 않고 알려고 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공부할 때 최대의 적이에요.”

축구로 다진 공부의 기초
축구는 그에게 절망과 좌절, 포기라는 인생의 쓴맛을 안겼지만, 그는 또한 축구에서 인생과 공부법을 배웠다.
“공부 한 번 해본 적 없는 제게 축구는 공부의 멘토였어요. 제가 처음부터 축구를 잘한 건 아니에요. 중학교 들어갔을 때 17명의 동기 중에서 달리기가 꼴찌였죠. 하지만 부족한 부분을 열심히 연습했고 결국 1등을 했어요.
연습과정을 지켜본 코치님이 저를 잘 봐주신 것도 그때부터였는데, 제 별명이 ‘코치 아들’이었을 정도로 저를 아껴주셨죠. 내가 지금은 남들보다 좀 못해도, 꾸준히 노력하면 앞지를 수 있다는 걸 그때 알았어요. 그래서 공부를 하면서 조급해하지 않을 수 있었죠.”
그뿐인가. 그는 축구를 통해 친구들을 사귀고 대학에도 들어갔고 결국 법률을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었다. “심지어 군대 가서도 축구 덕을 톡톡히 봤어요. 축구를 포기할 당시 그동안 고생한 시간이 물거품이 된 것 같아 좌절감이 심했는데, 제 인생에서 축구를 했던 시간은 결코 헛된 게 아니었어요.” 그는 지금도 조기축구회 활동을 하고, 축구협회 이사를 맡고 있을 정도로 축구와 연결된 끈을 놓지 않고 있다.
아이 교육과 부모의 역할
이 시대 부모들이 그렇듯 이중재 변호사에게도 자녀교육은 고민거리다. ‘부모가 돼 보니 어떻게 가르치는가보다 어떤 모습을 보여주는가가 더 중요한 것 같다’는 그는 부모의 가장 중요한 자질로 솔선수범하는 태도를 꼽는다. 그는 자신의 책 《독학의 권유》에서 많은 인물을 언급하는데,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냐는 기자의 물음에 ‘아버지’라고 답했다.
“아버지는 저에게 한 번도 이래라 저래라 말씀하신 적이 없어요. 말씀 대신 늘 당신이 먼저 솔선수범하셨죠.”
요즘 들어 아내와 자녀교육을 두고 이견이 종종 벌어지지만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그나 그의 아내 모두 지키고 싶은 부모의 덕목이라고. 요즘 아이들은 혼자 공부하는 것보다 누군가의 지시에 따라 공부하는 것에 익숙하다. 이런 아이들에게 독학의 의미에 대해 운운하는 게 넌센스일 수도 있다며 그가 말을 뗀다.
“교과서든 무엇이든 책을 보는 건 저자와 내가 대화를 하는 것인데 왜 학원 선생님이 알려준 방식대로 이해해야 할까요?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수많은 선택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요즘 부모들은 아이의 선택권뿐 아니라 아이의 미래에 대한 불안까지 자기가 끌어안으려고 해요.
그러니 아이들은 어렸을 때부터 스스로 선택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고 자라는 경우가 많죠. 성인이 되어서도 자기 인생을 다른 사람한테 의지하려 합니다. 제 부모님께 가장 감사한 건 제 선택이 잘됐든 잘못됐든 부모님이 절 끝까지 믿어주셨다는 겁니다. 부모들이 아이를 믿고 아이의 선택을 지지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저도 제 아이들이 스스로 선택하고, 그 결과에 책임지는 힘을 기를 수 있도록 이끌어주고 싶어요.”
한때 인생의 패배자가 된 듯한 절망감에 빠졌던 그에게 공부는 새로운 인생을 열어주었다. 사법고시 합격 후 얻은 가장 큰 자산은 자격증도 아니고 명예도 아닌, 자기신뢰였다고 그는 말한다. 그가 오늘 우리에게 묻는다. 자신이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스스로 알고 있느냐고.
“하고 싶은 게 있으면 하세요. 인생은 깁니다. 나중에 ‘왜 그때 그걸 안 했을까’ 하고 후회하는 것보다 더 끔찍한 건 없을 거예요.”
글·정소현 nalda98@brainmedia.co.kr
사진·박여선 pys0310@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