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영의 음악 속의 삶] “템포 루바토에서 관계를 배우다”

[이지영의 음악 속의 삶] “템포 루바토에서 관계를 배우다”

이지영의 음악 속의 삶

브레인 75호
2019년 06월 05일 (수) 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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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일곱 살이 될 무렵 나는 피아노를 시작했다. 악보를 처음 접했을 때가 생각난다. 오선지에 찍혀 있는 까만 점들을 뚫어지게 보며 단련되지 않은 작은 손가락이 건반 위의 한 음 한 음을 찾기 위해 애쓰던 모습이 기억난다. 처음 피아노를 칠 때는 정해진 음과 쉼표의 길이만큼 정확히 누르고 떼기를 반복하는 과정이었다. 박자만 잘 지켜도 제법 잘 치는 것처럼 들렸다. 박자를 정확히 지켜 연주하는 것에 길들여질 즈음 모차르트와 베토벤을 만났다. 이제는 건반 위의 음들을 눈으로 찾는 대신 손의 감각으로 연주할 수 있게 됐다. 가끔씩 도약이 많은 음을 눈으로 확인하지만 조급하지 않다.

눈과 손이 마치 하나가 된 듯 편안하게 될 때 기본 박자에 나만의 박자를 느끼는 여유로움도 생겼다. 특히 쇼팽을 만난 이후엔 ‘나만의 박자’를 좀 더 표현하고 싶어졌다. 쇼팽은 자신의 피아노곡을 드라마틱하게 연주하려면 박자를 넘나드는 기술이 필요하다고 말하면서 그 기술을 템포 루바토tempo rubato라 불렀다. 템포tempo는 ‘시간’을 뜻하는 이탈리아어로 음악에서는 ‘박자’를 의미하고, 루바토rubato는 ‘훔치다’라는 뜻을 가진 이탈리아어 루바레rubare에서 유래했다. 직역하면 템포 루바토는 ‘박자를 훔치다’라는 뜻이 된다. 연주자가 박자를 훔치듯 자신의 재량에 따라 곡을 빠르게 또는 느리게 연주하고 원래 박자로 돌아가라는 뜻의 음악 용어다.

# 2

템포 루바토가 주는 효과는 가수가 자신이 가진 기교를 한껏 보여줄 수 있는 클라이맥스에서 좀 더 시간을 끌며 노래할 때 청중이 짜릿한 전율을 느끼는 것과 비슷하다. 이렇게 박자의 완급을 보여주는 것이 연주자의 안목이자 센스다. 라흐마니노프가 극찬한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인 요제프 호프만은 “루바토를 연주하는데 필요한 것은 안목good taste”이라고 했다. 안목이 있는 연주자가 템포 루바토로 연주하면 박자만 훔치는 것이 아니라 관객의 마음을 훔칠 수 있다는 것.
그럼 안목은 어떻게 생기는 걸까! 안목은 곡의 원래 박자를 놓치지 않고 연주할 수 있을 때 생겨난다. 원래 박자에 민감해야 연주가 느려진 건지, 빨라진 건지를 금방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박자를 무시한 템포 루바토는 불편하다. 점점 느리게만 연주하면 처지는 느낌이 들고, 반대로 계속 빨라지면 쫓기는 느낌이 든다. 가장 기본적인 박자를 무시한 채 자신이 생각하는 박자만을 내세운다면 매력적인 연주가 되기 어렵다.

사람과의 만남도 마찬가지다. 박자를 훔치듯, 마음을 훔치는 능력은 인간관계에서 누구나 갖고 싶은 능력이다. 마음을 훔친다는 표현보다 마음을 산다는 표현이 더 좋겠다. 좋아하는 사람의 마음을 사서 연인이 되고 싶고, 친구의 마음을 사서 소중한 벗이 되고 싶고, 선생님의 마음을 사서 아끼는 제자가 되고 싶은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다. 사람의 마음을 사고, 마음을 움직인다는 것은 음악적으로 봤을 때 상대방이 갖고 있는 고유의 박자를 존중하면서 ‘나’라는 상대방과 다른 박자를 살포시 얹는 느낌으로 대하는 거다. 템포 루바토로 연주하듯 상대에 대한 존중을 바탕으로 관계의 완급을 조절하다 보면 결국 마음을 살 수 있지 않을까.

# 3

인간관계에서 원래의 박자는 상대방이 갖고 있는 생각, 관념, 체험, 생활 패턴 등을 존중하는 마음이라 할 수 있다. 가장 이상적인 관계는 어떤 상황에서도 상호 존중이라는 고유의 박자를 지킬 때 만들어진다. 동시에 밀고 당기면서 갈등과 긴장이 생겨나더라도 이해하고 양보하며 상대를 존중하는 마음을 유지할 때 관계가 지속될 수 있다. 관계의 밀고 당김(밀당)은 모든 인간관계의 필수 요소다.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 부부 사이의 관계, 친구들과의 관계에서도 밀당은 늘 존재한다. 안목이 있는 사람이란 갈등 상황에서도 어떤 속도로 언제 다가가야 할지를 감각적으로 알아내고, 상대방에 대한 존중과 배려로 갈등을 풀어낼 수 있는 사람이다.

호프만은 ‘루바토의 원칙은 균형balance’이라고 했다. 음악이 너무 처지는 느낌이 들거나 급해지는 느낌이 든다면 균형이 깨진 것이다. 곡의 박자를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나를 내세우는 연주는 아름답게 들리지 않는다. 균형 속에서 상대의 고유 박자를 존중하며, 나다움을 보일 때 음악적 해석이 깊어지듯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깊이와 여유로움이 생긴다.

템포 루바토는 음악에서뿐만 아니라 인간관계에서도 필요하다. 진정한 소통으로 가기 위한 방법이다. 템포 루바토로 연주해보고 싶지 않은가! 음악을 드라마틱하게 만들 듯, 관계에서도 드라마틱한 소통이 시작될는지도 모른다. 

글. 이지영 leemusiclab@gmail.com | www.leemusiclab.com
이화여자대학교 음악대학을 졸업하고 위스콘신대에서 음악학 박사 학위를 받은 이지영은 피아니스트, 음악 방송인, 공연 기획자, 콘서트 가이드, 음악 큐레이터 등 폭넓은 활동을 하면서 ‘삶 속의 음악, 음악 속의 삶’이라는 화두로 대중과 끊임없이 소통하고 있다. 다양한 경험과 만남을 통해 얻은 삶의 지혜를 2019년 한국뇌과학연구원 발행 《브레인》을 통해 나누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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