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역사를 딛고 세계와 한국이 만나는 곳, 이태원

[김양강양의 서울에서 여름나기] (2) 이태원 - 역사와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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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소년은 대공원 / 노인들은 양로원 / 아이들은 유치원 / 우리들은 이태원
 이태원 프리덤, 저 찬란한 불빛 오 오 오 / 이태원 프리덤, 젊음이 가득한 세상~!"

지난 2011년 6월 어느 날 개그맨으로 한창 잘나가던 유세윤이 돌연 가수로 변신했다. 팀이름은 UV, 노래 제목은 '이태원 프리덤'. 강남과 홍대는 사람이 너무 많고 신촌은 뭔가 부족하다며 부르짖었던 곳, 애들도 어르신들도 말고 젊은 우리들이 모이는 곳, 바로 이태원이다.

이태원이라고 하면 요즘 젊은이들에게야 UV가 부른 '이태원 프리덤'과 각종 클럽들 덕분에 색다르고 놀기 좋은 곳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나이대가 조금만 올라가도 '이태원'의 이미지는 그리 밝고 긍정적이지만은 않다. 이태원 미군기지를 중심으로 한쪽에서는 범죄와 매춘이, 또 다른 쪽에서는 고급 주택단지가 지어졌던 곳이다.

이러한 이미지는 '이태원'이라는 지명의 무수한 변화와 함께 우리 역사의 아픔과 그 궤를 같이한다.


이태원은 배나무가 많이 자라는 곳이기도 했지만
왜군에 강간당한 이들이 살던 곳이기도 했다


오늘날 사용되는 '이태원(梨泰院)'이라는 지명은 조선시대 역원(驛院)을 둔 데서 비롯됐다. 원(院)은 조선시대에 공용자(公用者)에게 숙식을 제공하는 시설인데 이 역원을 두면 그 주위에 마을이 형성되고 마을의 이름도 원의 이름을 따라 불렀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한성부 역원을 보면 "이태원(梨泰院) 목멱산(木覓山 남산) 남쪽에 있다."라는 기록이 나온다. 利泰院, 李泰院이라고도 했다. 조선시대 전염병이 창궐하면 이태원에 별도로 진제장(賑濟場; 진료소)을 두어 백성들을 치료했다.   

 

梨泰院은 당시 이 인근 지역에 배나무(梨)가 많다고 하여 붙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 속 이태원은 배밭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조금만 파고들면 그 속 이야기가 나온다.

 

1592년 임진왜란 당시 15만 명이 넘는 왜군은 두 달 만에 평양까지 파죽지세로 진격했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주둔했던 곳이 바로 이태원이다. 이태원에 터를 잡고 약탈을 일삼던 왜군들 중 일부는 임진왜란이 모두 끝난 뒤에도 조선에 남아 귀화했다. '배다른 이들이 사는 곳'이라 하여 '이태원(異胎院)'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조선 말기의 문신 이유원(李裕元 1814~1888)이 편찬한 『임하필기(林下筆記)』에는 "우리나라의 남문(南門) 밖에 또한 이태원(異胎院)이 있는데, 임진년(1592) 뒤에 왜인(倭人)들을 이곳에 옮겨 두고 인하여 이름을 삼았으나, 지금은 상고할 수가 없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임진왜란과 관련된 이태원에 대한 새로운 이야기도 전해진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부터 1598년까지 일본은 2번이나 조선을 침략했다. 이 때문에 100만 명이 넘는 조선 백성이 나라를 지키다가 목숨을 저 버렸고 농토 대부분이 파괴되었다.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은 왜군에 의해 모두 불타 사라졌다. 왜군들은 조선 여인들을 강간하고 전쟁에 패한 조선군인들을 노예로 만들었다.

 

당시 임진왜란 내내 통솔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갈팡질팡한 선조에 대한 백성들의 원성이 거셌다. 이에 선조는 왜군들에 강간당한 수많은 이들을 도와주고 싶었다. 이에 강간으로 원치않는 임신을 한 이들을 위해 거주지를 마련해주기로 했고 이 거주지가 모인 곳을 '임신한 여자의 주택'이라 하여 '잉태원(孕胎院)'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는 것. 훗날 잉태원은 '이태원'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우리 민족의 숨통을 쥐락펴락한 외국군대가 주둔하던 군사지역에서
세계와 한국이 만나는 퓨전의 메카로 거듭난 '이태원'


이태원과 외세의 인연은 임진왜란에서 끝나지 않는다. 이후 구한말인 1882년 조선의 구식 군대가 신식 군대인 별기군(別技軍)과의 처우 차별을 참지 못하고 폭동을 일으킨 임오군란과도 인연이 있다. 구식 군대를 진압하기 위해 조선에 온 청나라 부대가 주둔했던 곳 역시 이태원이다. 이후 1910년 일본이 조선에 대한 식민 지배를 시작하며 일본군 조선사령부를 세운 곳도, 1945년 해방 후 미8군이 사령부를 설립한 곳도 모두 이태원이다.

1950년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이태원은 서울에 주둔한 미군기지가 정착하면서 군사지역으로서의 색채가 짙어졌다. 이와 함께 미군들을 위한 각종 가게와 주점, 기지촌 등이 들어서면서 미군위락지대로 바뀌었다. 한국전쟁 당시 북에서 남으로 넘어온 월남민들이 집단 거주하면서 '해방촌'이 형성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1960년대에는 이태원과 인근 한남동을 중심으로 외국공관이 자리 잡더니 1970년대에는 부평에 있던 121 후송병원이 이태원 미8군 영내로 이전하면서 미군의 색채가 더 짙어지게 되었다. 70년대 후반에는 섬유 등 경공업이 호황을 누리며 이태원에서는 색다른 쇼핑이 가능한 곳이자, 값싼 노동력을 제공하는 공급지로서의 역할도 하게 되었다.

1980년대 '86아시안게임' '88서울올림픽'을 통해 본격적인 개방의 시대를 맞아 역사 속에서 자의든 타의든 외래문물과 함께해온 이태원이 급부상하였다. 우리나라를 찾는 외국인 관광객들이 꼭 들르는 쇼핑코스이자 밤 문화 창구로 역할도 하게 되었다. 1997년 관광특구로 지정된 이후에는 미군 중심의 거리에서 세계인의 거리로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최근에는 가장 세계적인 것과 가장 한국적인 것을 함께 만나는 '퓨전'의 메카로도 활약하고 있다.


글. 강천금 sierra_leon@liv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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