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어야 산다

브레인 Vol. 32

뇌문화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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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 . 기자 |입력 2013년 01월 15일 (화)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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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위 구절은 김춘수 시인의 유명한 시 ‘꽃’ 중의 한 대목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 하면 이 시가 떠오릅니다.

제가 대학 다닐 때 남학생들이 연애편지에 가장 많이 인용한 시도 이 시고, 여학생들이 연인으로부터 가장 듣고 싶어한 시도 이 시입니다.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 정말 언제 들어도 좋은 구절입니다.


이 시가 그토록 가슴에 남아 있는 것은 어쩌면 우리는 모두 잊는 것을, 그리고 잊히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기억은 사실 우리 인간이 가진 가장 고귀한 자질 중의 하나입니다. 인간은 기억하는 동물이며 또 기억의 중요성을 아는 동물입니다. 기억하지 않을 때 우리의 존재 자체가 허물어져버립니다.

그래서 옛날부터 우리는 기억을 찬미하고 기억의 의미를 강조해왔습니다. 기억과 추억은 노래와 시와 소설과 영화의 단골 주제입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우리는 살면서 “영원히 잊지 않을게” 혹은 “언제까지나 기억할 거야” 같은 말들을 종종 하게 됩니다. 상투적이긴 하지만 듣기에 과히 나쁘지 않습니다.


기억이 그토록 중요한 또 다른 이유는 학습과의 관련 때문입니다. 기억하는 과정이 없다면 학습은 불가능합니다. 학습이란 우리가 경험하고 배우고 습득한 지식이 뇌에 부호화되어 저장되는 것을 말합니다. 즉 무언가가 저장되어 기억되지 않으면 배움도 없다는 뜻입니다. 학생들이 어떻게 해서든 기억력을 증진시키려 노력하는 것도 다 그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잘 기억하는 것, 많이 기억하는 것이 과연 좋기만 한 것일까요? 신경과학의 측면에서 본다면 지나치게 많이 기억하는 것은 기억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잘못된 기억입니다.

잊혀야만 하는 것이 잊히지 않을 때, 혹은 온갖 잡다한 것이 과도하게 기억으로 저장될 때 그것은 기억 장애에 해당합니다. 사실 지나친 기억은 건망증 못지않게 우리 삶을 불편하게 합니다. 니체는 망각이 없으면 진정한 의미에서의 삶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역설한 바 있습니다.


굳이 어려운 신경과학 이론을 빌려오지 않더라도 우리는 일상에서 과도한 기억의 부작용을 자주 경험합니다. 부부싸움을 예로 들자면, 대부분의 부부들은 싸울 때 과거의 온갖 섭섭했던 일들을 다 기억해냅니다. 놀라운 기억력이 평소의 건망증을 대체합니다.

가방 속에 꼭꼭 넣어가지고 다니던 물건들을 한꺼번에 다 끄집어내듯이 과거에 배우자가 섭섭하게 했던 것을 조목조목 생생하게 되살려냅니다. 이럴 때는 정말 기억한다는 것이 거추장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실제로 과도한 기억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것이 상당히 어렵습니다. 역사상 가장 유명한 기억술사 중의 한 사람인 솔로몬 셰레세프스키는 그 좋은 예입니다.

1920년대 초 어느 날, 구소련의 저명한 심리학자인 루리야의 사무실에 솔로몬이라는 신문기자가 찾아왔습니다. 그의 문제는 지나치게 기억을 잘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름이건 숫자건 보는 대로 듣는 대로 기억을 했습니다. 루리야 박사는 이 비상한 기억력을 설명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동원했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솔로몬은 보통사람들과 달리 단어와 숫자를 감각으로 받아들인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예컨대, 그가 일련의 숫자를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는 것은 그 숫자들을 마음속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루리야는 환자의 비상한 기억력이 감각 통로 간의 신기한 상호침투에 의한 것이라 결론지었습니다. 보통 사람에게 응당 있어야 하는 시각, 청각, 촉각, 및 후각 간의 경계선이 그에게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면 놀라운 기억력을 타고난 솔로몬의 일생은 어떠했을까요? 그는 이리저리 직업을 바꾸다가 결국 전문기억술사가 되었지만 전혀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기억술 묘기 외에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습니다. 너무 많은 것이 머릿속에 저장되어 새로운 것을 배울 수도 없었고 새로운 것을 경험하기도 어려웠습니다.

독서조차 그에게는 어려운 일이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책을 읽다가 ‘계단’이라는 낱말이 나오면 그의 머릿속에서는 과거에 자신이 올라갔던 계단이 떠오릅니다. 그것을 되살리다 보면 독서의 방향이 흔들립니다. 그는 공부도 독서도 할 수가 없습니다. 주체할 수 없는 양의 기억은 요점을 흐려놓기 때문입니다.


결국 루리야 박사가 기억술사 환자를 검사하면서 도달한 결론은 잘 잊는 것은 잘 기억하는 것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인간은 때로 잊어야만 살 수 있습니다. 많은 신경과학자들이 잊는 법을 연구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특히 나쁜 기억의 제거는 삶의 질 개선에 기여하기 때문에 해마다 새로운 연구 결과가 나오고 있습니다. 약이나 수술을 통해 나쁜 기억을 지운다는 생각은 이제 공상과학 소설이나 영화만의 이야기가 아닌 듯합니다.

지난 4월에는 UCLA 세포신경과학자인 데이비드 글레즈먼 박사가 나쁜 기억을 수집하는 단백질을 발견했다는 연구 결과가 보도되었습니다. 그 단백질의 활동을 제어하면 나쁜 기억을 지울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입니다. 또 스웨덴의 어느 연구진은 운동신경자극을 조절함으로써 기억을 제어할 수 있다는 주장을 하여 언론의 주목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런 보도를 접하다 보니 불현듯 톨스토이가 생각납니다. 톨스토이 역시 잊음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세 가지 질문>이라는 짧은 우화에서 과거의 기억에서 벗어나라고 가르칩니다.

톨스토이에 의하면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은 과거가 아닌 ‘지금’입니다.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나와 함께 있는 사람’이고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나와 함께 있는 사람에게 잘 하는 일’입니다.


또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지난해에 있었던 나쁜 일들, 슬픈 일들의 기억은 다 털어버리고 현재, 오로지 현재의 일과 사람에 집중하는 한 해를 기원해봅니다.

글·석영중 고려대학교 노어노문학과 교수.
《뇌를 훔친 소설가》, 《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 《톨스토이, 도덕에 미치다》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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